1차

친애하는

백꿈 2019. 11. 28. 22:53

 

 

 


 

당신보다 아름다운 목소리를

난 지금껏 들어본 적이 없다

이 목소리로 내 이름 한 번만

나긋하게 불러주면 나는 더 바랄 것 없겠다고,

내가 다 침몰해도 좋겠다고

|세이렌, 서덕준

 

 


 

※ 자캐 '마토 히로카' 고백로그

※ '교실 뒷편에는 천사가 묻혀있다' 기반 커뮤 자캐로, '이지메, 가해' 등의 언급이 존재합니다. 러닝 당시와 글을 올리는 현재 시점에 N년의 간극이 존재하며, 오너는 '교뒷천'이 비윤리됨을 인지하고 있으며 소비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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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현재에서 과거 그리고 미래까지중학교에서 고등학생으로어른으로 한 걸음 내디디며 피어난 변화는 높아진 눈높이한층 더 낮아진 목소리 같은 신체뿐만이 아니다변화가 일던 순간들흘러간 시간 속에 스며들어 있는 네가 눈에 밟힌다가슴에 들어찬다우연찮은 깨달음은 영원히라도 될 것처럼 깊이 새겨졌다단 한 번 되새기기도 벅찬 감정에 세월이 무게를 더하고속에서 한가득 찰랑인다시선이 마주친 순간 손길로 전해진 네 온기그리고 네 세상 안에서 빛나던 눈동자푸른빛의 시선그게 왜 그토록 저릿한지.

 

01 

 

기억 속 너와 내가 존재하게 된 순간을 밟아본다중학교 2학년더위가 발을 들일 무렵어른이 되지 못한 어린 내가 추구했던 것은 가히 쾌락 주의자를 모방했다즐거움을 위해선 흥미로운 소재와 흘러가는 사람이 필요했고기쁘게도 스스로가 속해있던 2-A반은 만족스러운 환경이었다.

 

시끄러운 분위기끊이질 않는 소음모범적이고 착한 천사 같은 아이들그리고 그런 천사들이 주도하는 이지메까지개중엔 마지막이 걸작이다평화로운 일상에는 자극적인 진실이 숨겨져 있었다일탈의 감각놀이는 정말 그뿐이었다이지메라는 단어를 벗어난 또 다른 무언가어릴 적부터 귀에 딱지가 박히도록 들어왔던 그릇된 행동 따위보다 훨씬 구미가 당겨오는 게 당연했다.

 

어쩌다 한 번씩 네 옆을 스쳐 갔다우에다 유이토동급생에 같은 반 친구로서 가벼운 말 한마디나 주고받는 사이누구와도 할 수 있던 이야기는 다시 훑어도 빠르게 지나간다그러다 정말 우연하게도 한가한 우에다 씨한가한 마토 씨장난 가득한 수식어다.

 

오히려 그건 마토지.”

뭐어내가 잘못 들은 거 맞지?”

귀가 안 좋은 거야걱정이네병원이라도 가보지 그래.”

이것 참……걱정해줘서 고마운 걸친절한 우에다.”

.”

 

태연히 대꾸하는 네게는 웃음기가 스며있었다타인에 대해선 어떤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던 내가 왜 그와의 대화는 계속해서 이어갔던 건지계속 한마디를 건넸던 것인지 스스로도 이유는 알 수 없지만……글쎄그런 사람이 처음이었던가?

 

'평범해 보여도 이지메나 개놀이에 침묵하면서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사람이고입맛 특이하게 팥빵이나 녹차 맛 하겐다즈를 좋아하고 리듬 게임을 즐겨 하는그리고 안경이 잘 어울린다.’ 다소 조화롭지 못한 긴 수식어를 지닌 동급생은 그때까지도그리고 지금까지도 유일하다당시엔 하나를 알아갈 때마다 새로웠다그와 친해지는 데에 있어 본래 타인에 대한 선입견이 깨지며 더욱 흥미가 동한 점을 부정하진 않는다표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상대적으로 차분한 농담이라니이상하게도 무척 잘 어울렸다는 점에 주목한다단순히 주관적인 평가일지 객관적인 사실인지 판단할 기분은 아니었다소위 요비스테를 했을 때도한 마디 두 마디 사이에 자연스럽게 더해진 세 음절에 은근히 웃고는 자신 또한 친근한 호칭을 부르지 않았던가애당초 스쳐갔던 생각이지만 먼저 움직이지 않았던 것을선뜻 손을 내밀어오는 모습은 호감을 불렀.

 

 

천사 같은 2-A아이들이 깊숙이 숨겨놨던 비밀은 각각의 가치마다 다르게 평가됐다누군가는 놀이로혹자는 이지메보다 질이 나쁘다 외치며 주동자들을 비난했다. ‘용감하네박수라도 쳐줘야 하려나?’ 같은 생각만 들 뿐이지만의도가 정의구현이었든 죄책감에 비롯한 행동이었든 간에 뒤늦게 행하는 정의가 폭력으로 변질될 수 있음을 그들은 미처 몰랐던 모양이다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것이 어리석을 만큼 반발은 극심했고 소수는 다수에게 묵살 당했다누구라도 인생에 빨간 줄이 그어지는 걸 반길 리 없었다사세 당연했다.

 

"어떻게 생각해?“

 

우에다가 되물었다현재에서 한 마디를 거슬러 올라가면 우에다의 관념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고그것이 나와 반대되는 입장이란 것도 짐작 가능했지만대답에 망설임은 없었다.

 

"물지도 못할 바엔 짖지도 말아야지.“

 

분명하게도 우린 달랐다넌 암묵적인 사람이었지만불현듯 나타난 개놀이는 너와 나의 차이점을 드러내는 것이다대립 되는 이념은 타인을 갈라놓기에 탁월한 것일지라도 우연의 일치인지 서로를 부정하지 않았고우리는 눈을 감았다.

 

 

 

 

 


 

 

 

흐드러지게  벚꽃이 하나둘씩 떨어지는 순간을 교실 창문 너머로 발견한다일과의 마지막 수업은 몽롱하다턱을 괴고 나른함에 젖어 늦은 시침을 재촉하고눈동자는  의사를 무시하고 목적지를 정했다움직임이 느릿하다시야를 검게 물들였다시각을 제외한 감각이 예민해진다

 

닳은 속살거림두근거림공기 중에 퍼져있는 분필 냄새가 바닥으로 가라앉고샤프심이 하얀 종이에 마찰하는 소리가 귀에서 작게 진동한다살랑거리는 바람에 커튼이 흔들리고 상념과 함께 쓸려간다시간을 따르는 잔상이 선명해진다수면  파동이 잔잔해지면 뚜렷한 달이 그려지는 것처럼조금씩조금씩내가 무지했던 .

 

유독 웃음이 많았다이따금 시선이 머물고또다시 웃는다.

 

친구라서 그런 걸까.

 

학교를 벗어나던 귀갓길에  생각이 났다집에 돌아가 옷을 갈아입다가도잠을 청하려 침대에 몸을  때도하루 24시간  1분에는  생각이 베여있었다 1분이 반복된다수십 번을 일과처럼

 

이게 정말로 친구가 맞을까.

 

눈을 뜨고깜빡였다흐른 시간 1시선이 멈춰있던 곳은.

 

 

유이토

 

 

  음절이다 내리면 흔적이 남고만족할 때까지 적다간 닳을까 싶어   적지도 못하고 펜을 내렸다하얀 종이  투명하게 새겨진  

 

고요한 부름이 달다여린 호흡이 입술 사이로 샜다.

 

봄에서 여름으로아침에서 저녁으로 넘어가고 졸음이 몰려오는 시간학교에서교실에서책상에 앉아서잠에 취해 수업을 듣다가문득 너를 발견하고.

 

사랑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어릴 때 책 좀 더 읽을 걸 그랬나현재 나의 어휘로 내 심정을 고스란히 표현하기란 불가능에 가깝기에 줄곧 멍하니 창밖을 보다 혀를 내차며 자책하곤 했다그럴수록 떠오르는 건 조곤조곤 의미를 담아 늘어놓던 너의 말목소리는 잔잔함을 담고 울려 전달력도들을 때의 느낌도 좋았다그런 목소리에 장난기가 섞여들 때면 그래서인지 조금 더 즐거웠다그의 말이 더욱 선명히 기억에 남는 이유 중 하나라 짐작한다상념은 널 닮아 잔잔했다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너니까 당연한 걸까입안에서 맴도는 것이 포근하게 내려앉는다기도를 타고 내려가 심장에 닿고박동이 일정하게 울려 퍼진다이 현상의 원인이 무엇인지 이제는 알고 있었다.

 

좋아하는 마음에 몸이 멋대로 구는 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건지처음 깨달은 것은 낯설었다제대로 인지하고 받아들였는데도 그렇다솔직해지자면 이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원래 이런 건지 알 수조차 없으니…… 조금쯤은 억울해해도 되는 걸까.

 

마토 히로카가 우에다 유이토를 좋아한다문장처럼 간단했다면 좋을 텐데.

 

가을의 불그스름함이 완전히 저물 때까지.

 

상념이 길어진다널 떠올리고 있어.

 

 


 

꽃이 피고 진다중학교 3학년가장 덧없이 흘러간 한 해였다이미 속에서 싹 틔운 것을 가벼운 감정이라 칭하고 네게서 차차 멀어지려 했던아마도 감정을 끊어내려 했던 시기계기는 생각보다 단순했다그냥학교에서 학생들이 나눌 법한 숱한 이야기 중 하나를 들었다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지 못했을 뿐.

 

너 게이야?” 한가득웃음이 담겨서농담으로 취급된 말에 욕설로 가득한 답이 돌아왔다모든 게 자연스러웠다당연하게도 배척당하는 것이었다내가 품은 건.

 

동성애에 대한 시선이 썩 좋지 않다는 것은 어린애도 안다보편적인 부모를 뒀다면 더욱 확실히 박혀있을 테다나의 부모님은 확실히 보편적이지 않았다나는 그랬지만유이토는 모른다내가 아는 그라면 편견은 없겠으나 심증뿐이다확실치 않았다.

 

혹시라도 아니라면만약네가 거부감을 가진 상태에서 내가 품은 것을 들키기라도 한다면?

 

여태 쌓은 관계마저 틀어질 가능성이 있는 사고는 절연이란 리스크까지 안아가며 부정할 가치가 없었다본인에게 물어본다는 여지마저 없앴다우릴 수식할 관계라 해봤자 겨우 동급생친구그마저도 학교를 벗어나면 금방 끊어지고 완벽한 타인이 될 것이 분명하니 지레 조심스러워질 수밖에아쉬움만 가득한 친구 사이지만 너와의 인연을 끊는 건 바라지도 않았다그렇다면 지워져야 할 것은 나의 감정이었다.

 

한 끔도 남겨두지 않고 감정을 소모하는 것이 힘들 거라 짐작했던 것만큼, 1년이라는 시간은 느리지도 않았으나 짧지도 않았다가볍게 떨쳐낼 수 있다그리 생각했는데네 흔적을 쫓는 것을 인지하고 눈길을 돌리기만 수십 번의식적으로 멀리하기를 수십 분째 하는 자신을 떠올리면 생각을 달리할 수밖에 없었다.

 

숨기자적어도 네게 들켜서 멀어지는 일이 절대 없도록.

 

네가 허락한 이름을 계속 불렀다하지만 그마저 벅차기 시작하자 당혹스러워진 마토 히로카는 입을 잠그고 과거의 둘을 흉내 냈다. ‘유이토가 아닌 우에다’. 어느새 낯설어진 소리예전엔 잘만 불러놓고 왜 이제 와서 버겁게 느껴지는 건지.

역시 하루빨리 네게서 멀어져야 한다그래야만 했다버리지 못한 감정이 1년 동안 쌓이고 쌓여서 터지지만 않았다면고등학교가 달랐다면그리고 너를 다시 만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가능성이라도 남아있었을 텐데.

 

키가 자라고목소리가 변하고어쩐지 기억 속과 다른 모습이었던 너아차 싶던 순간감정에 떠밀린 어느 봄날의 끝에서 나는 네 이름을 부른다.

 

 

안녕유이토.

 

너는 그대로야아니변했네아쉽다예전에 넌 조금 더 귀여웠어반응도 그렇고사실 지금의 넌 조금 곤란해내가 사랑한 모습에서 더욱 성장한 너는…….

 

 

 


 

 

 

 

진학이 무색하게도 새로 오른 고등학교는 전혀 낯설지 않았다오히려 익숙했다마치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내가 멀어지려 했던 당시에 시간이 멈춰있다 이제야 흐르는 건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도 들었다유이토가 있었고 개놀이도 다시금 시작됐다즐거운 일임은 당연한데 어딘지 묘했다처음은 몰랐지만 이젠 알기 때문인지차이점이란 게 썩 맘에 드는 건 아니었다적어도 너와 비교했을 때는.

 

벌써 두 번째다이젠 서로에게 어떤 생각이려니 하는 그런 질문조차 불필요했지만개놀이는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불현듯 과거를 떠올리게 만드는 소재였다서로에게 침묵한 순간은 잊히지 않고 남겨졌다그러면 개놀이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는가그렇진 않았다개놀이를 놀이로 즐길 의향이번 히어로는 어떻게 나올지 상상하는 즐거움도 그대로였다마토 히로카는 달라지지 않았다.

 

두 번째 개놀이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번 역시 소수는 절망했다전과 똑같았다애초에 잘 이끌고잘 이끌려가기만 하면 손해를 입을 놀이가 아니었으니 자신도 동참했던 거고그런데도 내겐 지난번과 완벽히 똑같았다고는 할 수 없었다두 번째 개놀이에서나는 언쟁을 제외하면 어떠한 주동도 없이 얌전히 굴었다처음이 아니었기에 심심했던 건지 흥미가 식었던 걸까어쩌면 전혀 다른 곳에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정말로.

 

상념을 끊어낸다희미하게 떠올린 정답을 다시 끝까지 밀어 넣는다조금만 늦었어도 선명하게 드러난 것에 홀로 몇 번이고 후회했을 게 눈에 훤했다이런 식으로 상념을 끊어낸 적이 지나치게 많았다.

 

좋아해.’ 이 이상의 감정을 생각에조차 담지 않는 이유는 감당 못 할 만큼 크나큰 것이 되어 찾아올까 하는 우려다예방책이었다지금도 이런데 가뜩이나 더 깊어져 버린다면예감마저도 쓰리다상처투성이에 가시 박힌 손으로 심장을 움켜쥐는 느낌이 희미하게 찾아온다마음을 끌고 온 시간도 길어서 이기적인 사람은 힘든 기억만 가득이었다내가 이렇게 나약한 사람인 줄은 몰랐는데……또 하나를 너로 인해 깨닫는다하여간너는 무엇이든 베푸는 사람이다늘 그랬다모호한 말을 가만히 웃어넘기면 벼랑 끝자락으로 한 발자국 밀린 기분에 너와 나 사이의 거리를 가늠해본다안 보이는 선을 긋고 감정이 날뛰는 것도 무시한 채 한없이 가라앉아 은근한 질문만 되묻기 일쑤였다.

 

반복되는 일련 속에서 계속 생각했다절대 착각해서는 안 돼네가 베푸는 상냥함에는 진한 고통이 뒤따른다가끔 네 반응이 친구를 향한 건지 혹은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 이에게 보여주는 건지말도 안 되는 억측을 넘기지 못하고 괜한 희망을 품게 되는 것도 곤란했다하지만그럼에도 네가 상냥하길 원했다.

 

친구고이념이 대립했고제멋대로인 나를 유이토가 아니면 누가 받아줄지 모르겠는걸그러면서 깨달았다어느샌가 난 네게서 떠날 수 없는 이유를 찾고 있었고처음에 했던 짓궂은 농담도 더는 하지 못했다.

 

네가 좀 더 가까운 곳에 있길 원한다.

 

대화가 길어질수록 감정을 숨기기 어렵다는 걸 깨달았다친구 사이에서 드러낼 수 있는 호의도 요즘 들어 선을 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멈춰야 한다고 생각은 하는데 그러질 못해서 종종 스스로를 책하는 경우도 생겼다그러던 참에 네가 자신을 고작이라 칭했고내 일과를 마음대로 뒤바꿔놓은 장본인에게서 그런 소리를 들으니 다소 아연했다친구의 자격을 빌려 가며 아쉬운 대로 본심의 한 귀퉁이도 안 되는 것만 얘기하며 지내왔는데……그런데 이건 뭔가 억울하지.

 

어느새 대화는 일과가 됐다타인에겐 하지 않을 낯간지러운 말을 진심으로 뱉는그런 대화.

 

유이토가 볼을 쿡 찔러왔다.

 

뭐야… 왜 찔러.”

그냥보기 좋아서별로였어?”

 

물론잘 어울린다는 말에 웃던 거지만……당황하면 생각조차 흐려질 수 있단 걸 그때 깨달았다호의가 담긴 네 대답에 조금 놀랐다기뻤고당연하게도 별로였을 리 없다평소처럼서로에게 잔뜩 좋은 말만 들려주느라 부드러운 분위기에 무엇보다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었다그런 사람의 칭찬이다기분 좋은 설렘이 들어찬다.

 

아니살짝 놀랐을 뿐인데?”

 

미소가 완연해서 자제하지 않으면 금세 들켜버릴 만큼친구일 뿐이라도 곁에 남아있으려는 내겐 굳이 내칠 이유도 맞장구치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장난을 기회 삼아 볼을 꾹 건드렸다그랬더니 정말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을 유이토가 해 와서……유이토에게 볼을 꼬집혔다는 사실은 마토 히로카를 깨나 당황케 했다물론 아프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간지러웠지 내심 놀랐지어쩐지 유쾌한 기분에 휩싸이고 만다먼저 거리를 좁혀온 것이 이렇게나 기쁘다그렇게 1, 2어느새 유이토의 볼을 아프지 않게 주욱 늘리고 있었는데그건 아마도 내 말을 부정한 네게 작은 심술을 부리고 싶어졌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만약 남이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을 본다면 바보 같다 하며 비웃을 게 뻔한데.

 

진짜로 됐어그럼 된 거지유이토?”

 

유이토가 손을 움직였다시선은 그대로다네 손이 점점 가까워진다 싶어 살짝 눈을 크게 떴을까곧 볼에서 따스한 감촉이 느껴졌다.

 

따뜻하네됐어정말로.” 짤막한 미소그리고.

 

이제 됐어정말 좋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다얼굴이 화끈하니 달아오른다불에 덴 것처럼 빠르게도 붉어지는 게 느껴졌다일부로 시선을 어긋 냈다심장이 요란스럽게 울려댄다어쩌면 좋지볼을 주욱 늘린 탓에 웃음소리 사이로 뭉개지는 말이 자꾸 스며든다따뜻했던 체온이 어느새 시원하게 느껴진다선명히 마주친 파란 눈동자손의 감촉웃으며 살짝 벌려진 입술전부 나를 향한 것들이다정말 예뻤다사람이 이렇게 예쁠 수도 있다는 걸 지금에서야 깨달았다단순히 외적인 것과는 조금 다른널 빛나게 하는 것유이토에게 실례일 지도 모르는 생각이 멈추질 않았다좋아하는 이의 그런 모습은 답지 않은 충동까지 벌컥 들게 할 정도로진심으로예뻐서……나는.

 

어쩐지 목이 멨다.

 

유이토시력 안 좋았던가.”

 

들키지 않아야 할 텐데.

 

다급한 마음에 숨기려 드니 몸이 멋대로 움직였다아주 짧은 순간어떠한 가림도 투영도 없이 온전히 드러난 푸른 눈을 마주하고 나서야 제 손에 들린 안경을 인식하고상당히 무례한 짓을 저지른 걸 깨달았다미안하다그리고 묘하게 만족스럽다눈동자가 드러나는 게 좋은 걸까살짝 고개를 숙였다.

 

히로카목소리가…….

 

목소리가 귓전을 두드린다여느 때처럼 너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오히려 생뚱맞게도 네가 여전하다는 것에 왠지 모를 안도감까지 들었다이상한 타이밍이지심장의 두근거림도 분위기 또는 네게 동화되어 묵직하지만 포근하게 울린다널 좋아한다는 첫 번째 증거는 조금 괴롭더라도 더는 무겁지만은 않았다어쩌면 어느 정도 이 상황에 익숙해졌기 때문일지도 모르고.

 

윤곽만 보인다는 네 말에 조금 안심했다적어도 감정이 다 드러나는 얼굴은 보여주는 추태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으니까무심코 다행이라 말하고 나서는 조금 아차 싶었지만.

 

여전히 따뜻해오히려 더울 정도로.”

더울 정도야기분 탓이 아닐까.”

그래다 기분 때문이겠지날씨도 이젠 시원한데.”

 

네 손등을 검지로 한 번씩 두들기기도 하며 천천히 쓸어내렸다온기가 존재한다네 손에 닿았을 뜨거움을 기분 탓으로 돌리고내 억지도 유이토가 수용해주니 걸림돌 없이 흘러갔다지금처럼 네가 조금 더 상냥하게 느껴질 때면 응석을 부리고 싶어진다무슨 어린애라도 된 것 같아네가 날 그렇게 만들어유이토속으로 슬쩍 웃어넘긴다.

 

몇 번의 대화가 오고 간다얌전히 기대어 묘하게 솔직해져 있는 내게 넌 정말 기분 좋아?”라고 물으며 눈가를 쓸어내렸고그 순간 속이 조금 울렁거렸다.

 

농담을 던졌다일부로속이 묵직하고 이상하게 울렁이니까저릿한 느낌을 모르는 척했다농담을 관두고 솔직한 심정을 담은 말끝에 탄식이 뒤따랐다.

 

그리고 돌아온 네 대답은 조금곤란하다고 생각했다.

 

 

 

 

 

솔직히이쯤 되면 모르는 게 이상하다.

 

마토 히로카는 바보가 아니라 관심을 가진 상대의 변화를 그저 흘려보내지 않았다유독 상냥했고웃음이 많았고종종 말을 흐렸다그 당시의 말과 상황이 네 머뭇거림이 속내를 대신했을 것이라 짐작한다그래서 더욱 네 얘기에 굶주렸다물론 직접 들을 수는 없었지만애초에 완벽한 타인이었다면 더 빨리 알아차렸을 것을물론 마토 히로카는 우에다 유이토의 타인이 아니고 또 신중할 수밖에 없는 감정이었으니까 늦은 것도 어쩔 수 없었다.

 

달콤한 가정이다자기만족이려나섣부른 판단일지도 모른다착각이라면 정말로 곤란했다. ‘사랑에 눈이 멀어 어리석은 짓을 저지른’. 어느 연애 소설에나 나올 법한 사람은 싫다섣부른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우에다 유이토 곁에 있을 마토 히로카는 그래선 안 됐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확신할까아마 그건상상만으로도 한가득 흡족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겠지네 앞에선 나약한 마토 히로카라서 그럴 것이다부정하고 싶지 않게 된다.

 

일과를 정리하고편안히 누운 채로 작게 웃음을 흘렸다예전이라면 상상도 못 할 모습인데또다시 너로 인한 변화다.

자그마한 행복이었다반면에 그림자 또한 짙어지고불안을 비롯한 의문 또한 피어났다.

 

연정인데도 어긋난다면……평행선하지만 멀지도 않은데그럼 우린 지금 등을 맞대고 마주 보지 않는 건가잔인하네.

너를 만나고 계절이 달라졌다교실의 아이들도등하굣길의 풍경도감정의 농도까지도 전부모든 게 달라졌다너와 나를 제외하면그래우릴 제외한 전부 말이다.

 

어째서대체 무엇의 연장선일까한 번 떠오른 의문은 끈질기게 따라붙는다이미 오랜 시간 끌어왔다적어도 전에는 지금처럼 노골적인 물음은 아니었는데 기나긴 침체가 이런 결과를 부른 걸까세월과 비례하게 서서히 조여 온다허나 이 부정적인 것은 단번에 크기를 불러 찾아올 수도 있었다그러니 완전히 잠식되기 전에 솔직해지길 바랐다간단하고도 어려운 얘기다상상조차 벅찬 것이 바로 너였다.

 

배려로 가득한 네 호의에 이기적인 사랑을 품게 된다무덤덤하게 죄악감을 받아들였다가능했다내겐 이런 감정은 처음이고 너도 날 좋아한다면양방향이라면 용서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넌 정말 상냥하니까그 사실은 도피처가 되고 때론 책망의 이유가 되기도 했다유독 너와 관련되면 변덕스러워지는 걸 느낀다.

 

서툰 첫사랑달콤한 말로 위장하기엔 메마르고 거칠다질이 나쁘다는 건 알고 있었다하지만그래서 나보고 어쩌란 건데…….

 

하늘을 부유하다가도 한순간에 추락하고다시 번복한다너와 관련된 모든 일에서 난 수십 살 먹은 어른이 되고모든 것에 무지한 어린애가 된다스스로 생각하기에도 혼란스러웠다종잡을 수 없었다.

 

 

 

 


 

 

 

 

 주위를 둘러본다눈에 익은 곳이다방과 후의 교실아마도 중학교고, 2-A난 책상 의자에 앉아 있었다어렴풋이 기억나는 내 자리였다커튼이 휘날리며 햇살이 넘실거리는 빈 교실은 공기마저 온화했다아니면 여름이 되기 직전이려나무엇이 됐든 간에 몸의 긴장도 풀리게 만드는 온도였다모든 것이 느긋하게 흘러갔다.

 

아마 이건 꿈이겠지한 번의 깜빡임에 가벼운 깨달음.

 

기억에 남아있는 풍경보다 조금 더 나른하고푸르다닮았다.

 

그러니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시야에 아른거리는 인영에 침음을 삼켰다.

 

내 꿈에 그만 좀 나와.”

네가 날 부르는 거잖아히로카.”

 

음성이 와 닿는다네 입에서 나오는 내 이름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달았다.

 

그래그 말이 맞지어디까지나 여긴 내 꿈속이니까.

 

마토 히로카의 소망소원바람 따위를 수용한 무의식이 반영된 장소.

 

시야를 가득 메우는 것은 내가 사랑하는 색이다눈이 살짝 커졌을까다시 천천히 멀어졌다실제로 얘기를 나누는 것처럼 책상을 사이에 두고의자에 걸터앉아 몸만 뒤로 돌린 채 바라보고 있는 꿈속의 너와 마주했다상체를 조금 기울인다한 손으로 턱을 괴고 느긋하게 눈꺼풀을 열고닫기를 반복했다가까이서 들여다본다꿈속의 너는 온전히 푸른 눈동자다더욱 선명하고 뚜렷하다.

 

잘 보여?

잘 보여.

 

그럴 리가유이토는 눈이 안 좋거든잠시 웃었다다소 가깝더라도 안경을 안 쓰고서 잘 보일 리가 없었다바로 그런 점 때문에 유이토의 안경에 손댄 적도 있었고물론 그 뒤에 깃들던 만족충족감파란색의 눈은 가끔 마주하는 것만으론 부족했다그게 내 생각보다 좀 더 간절했던 것 같고……이런 식으로 꿈으로 나올 줄 알았다면 네가 싫어할 짓은 하지 않았을 텐데.

 

물론 진짜 그럴 자신은 없었다.

 

이건 전부 꿈이지내가 무슨 짓을 하든설령 사람을 죽여도 누구도 내게 뭐라 할 리 없다는 거야……그렇지?”

 

알 듯 모를 듯모호한 미소다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손을 뻗어 네 손을 잡아당겼다손가락 사이를 파고들어 스치고간지럽히다가끝내 얽히게 한다손바닥이 닿았다양손으로 감싸 쥔다고개를 떨궈 입 맞췄다손가락 하나하나에 가벼운 스침소중하다곧 희미해질 꿈이어도 이 순간은 생생하게 다가온다도리어 비현실적일 정도로내가 원하는 모든 것들이 이루어지는 상황이면 위화감을 느끼며 꿈임을 되새긴다얌전히 내 손길을 받아 들여주는 유이토라니생각보다 욕망이 노골적이잖아.

 

……진짜 네가 이럴 리 없는데이건 정말 꿈같아서 슬프네.”

 

자조 섞인 웃음꿈속의 유이토는 말이 적다대신 시종일관 눈을 마주하고 때때로 손을 내민다그 미성을 들을 수 없는 것은 아쉽지만 내가 닿을 수 없는 말만 들려주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사락손가락이 닿았다익숙하게 눈을 감으며 머리를 스치는 네 손길에 집중했다엷은 숨을 뱉는다.

 

현실에서도 이래 줄 생각은 없는 거야?”

현실의 내게 물어보는 건 어때.”

농담이지?”

난 언제나 진지했잖아히로카.”

 

헛웃음을 짓는다꿈인데도 당해낼 수가 없네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목소리와 행동이 다정하면 뭐해말하는 건 그대로인데사실 그것만으로 만족했지만……꿈이었으니까어차피 나밖에 모를 테다.

 

한없이 길고 짧은 순간이 지나면목이 저릴 때쯤 고개를 든다동시에 손길도 떨어져 나간다시선을 마주하고 아쉬운 웃음을 짓는 널 보고서 이 꿈의 끝을 예감했다.

 

자는 건 몇 시간이나 되는데 정작 꿈을 꾸는 건 몇 분에 불과하지그거 알아평소엔 아무래도 상관없는 게 너만 나오면 항상 의문점이 돼.”

그래신기하네알고 있지그럼다음에 또 보자히로카.”

진짜 뜬금없게영혼 없는 말이나 뱉고 말이야…….”

 

정말 중학생이냐고질책을 담고 짤막이 웃는다.

그리고 암전이었다.

 

 

…….”

 

꿈이 깨지며 현실이 불쑥 덮쳤다늦잠이었다제 쓸모를 다 못하고 허리춤에 걸쳐져 있는 이불을 잡아당겨 머리끝까지 덮었다입술이 바짝 말랐다마른 숨을 몇 번인가 내쉬고아직 선명한 장소를 몇 번이고 되돌린다.

그리면 그릴수록 조금씩착실하게 창가와 바닥이 무너져내리고 형체를 유지하는 건 우에다 유이토와 마토 히로카 둘이다.

아니……마토 히로카 뿐이었다.

 

창가로 들이치는 햇살이 원망스럽다부스스 떠지는 눈을 몇 번이고 다시 닫았다.

 

 

 


 

 

 

네가 나오는 꿈을 꾸고 난 다음 날이면 아무렇지 않던 한마디도 깊숙이 상처를 남긴다.

 

너와 함께인 모습을 언제나 상상해왔는데결국 넌 잡을 수 없는 곳에서만 존재하니까꿈속의 네가 남긴 웃음이 흐릿한 잔상을 남긴다겨우 한날의 꿈그 허망한 것에 이리저리 흔들린다.

 

억눌린 것이 무너지며 마음을 범람했다타는 갈증은 일상이 되어 속에 머물렀다그렇게 호흡기에 염증이라도 생긴 마냥 숨마저 벅차다가도 정작 네 미소를 보니 또 웃음이 나오는 게아무래도 네 앞에선 본인마저도 아무것도 아닌가 보지그러니 아픔을 망각하고 웃는 것이 틀림없다스스로 정의하길 쾌락 주의자인 내가 겨우 한 사람에 의해 숨겨둔 그늘이 수면 위로 떠 오르는 게 두렵다그만큼 네가 내 안에서 크다는 의미니까그런 네게 밀쳐졌다는 생각이 들거나 친구라는 울타리 안에서 그 이상으로 다가갈 수 없는 것을 깨달을 때면 어찌나 억울한지허름하고 낡은 울타리를 뛰어넘거나 무너트릴 생각도 못 하고 손만 올려 겨우 몸만 지탱했다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너를 바라본다거친 표면에 쓸려 발갛게 달아올랐다.

 

상냥함이 잔인할 수 있다는 것도 네가 알려줬다너의 한 마디는 비수가 되고무참히 꿰뚫고 지나친다더욱 웃는다사실 너도 알고 있잖아말해 줘유이토꼭꼭 감춰둔 속내가 입술 사이로 튀어나올까 두렵다한 번 입 밖에 내버리면 바닥끝까지 드러낼 게 분명한 마음 위에 가림막을 씌웠다.

 

저린 속을 삼키고이러면너 역시도.

 

유이토.” 다정한 말을 뱉는다.

 

 

우리는 서로에게 잔인하다전하지 못한 마음이 고여 악취가 났다아직은 너를 배려할 정신이 남아있었다곯아가는 것을 끌어안는다이미 익숙하지만 때때로 견딜 수 없이 지칠 때가 있어서 가끔 너를 원망하기도 했다달콤한 회피였다. '사랑은 언젠가 식는다.'라고, 3년이란 기간이 최대라고 한다이미 2년이란 시간이 흘렀다그렇다면 세상이 한 번만 더 분홍빛으로 물들고 시든다면 널 떠날 수 있을까이 아픔도 더 안 느껴질까지금까지 사랑한 시간이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는 가정은 순간은 편안할지라도조금이라도 정신을 차린 뒤부턴 감당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회피는 짧았다옅은 만족감은 빠져나가고 진득한 자괴감이 빈자리를 채웠다.

 

욱씬골이 울린다입술을 잘근 깨문다느린 숨을 내쉬었다눈을 감는다생각을 비워낼수록 차오른다네가네가 보고 싶었다.

 

 


 

어떤 의미인지 알려줄 수 있어?

 

별 것 없었다여느 때처럼 툭 던지던 은근한 질문이었다너의 예외라 말한 내가 어떤 의미의 존재인지이번엔 네가 먼저 솔직히 말해주길 바라는 말이다아마 넌 여느 때와 똑같겠지만알고 있었다이미 몇 번이고 겪어본 일이었으니 내가 원하는 대답은 나오지 않을 것이란 것도 잘 알고 기대해서도 안 되지만어디 그게 마음대로 됐던 적이 있던가원치 않는 희망 고문이다예외라는 말이 네 입에서 나온 뒤부터 자꾸만 해선 안 될 기대를 품게 된다또다시 흐지부지 끝나면 홀로 상처 입을 게 뻔한데만일 대답이 돌아온다 해도 거부당하면 그때엔 정말 어쩌려고정말 기대란 게 나를 따라주지 않는다그리고 그렇게네가 내밀어 온 답에 나는…….

 

어떤 의미의 예외일 것 같아질문에 질문으로 답할게그래도 괜찮지관대한 마토?”

 

분명히기대란 건 제멋대로지만 제대로 된 대답 한 번 해주지 않는 네게서 과거 애정에서 비롯한 호칭을 듣자 머리가 핑 돌았다단번에 확 치솟으려던 것은 차게 가라앉는다벌써 수십 번도 겪은 일이다강제로 화를 억눌러 이성을 유지하려는이제는 익숙한 과정이었다.

 

머리가 차게 식자 가장 깊숙한 곳에 머물던 것이 스멀스멀 벽을 타고 올라온다서서히 뒤덮여갔다여기서 그 이름을 부르는 이유가 뭐야예전부터 이어져 온 말도 안 되는 호칭을 지금 이 순간서로를 정의 내릴 때 꺼내들 건 뭐야속이 울렁거렸다어째서유이토열기가 침체한다서서히 가라앉는다그러나 날카로운 잔재들이 여전히 속에 부유했다공존할 수 없는 모순적인 감정은 때때로 밑바닥에서부터 기어 올라와 번갈아 뒤흔들곤 했다아주 얌전하다가도 눈치 못 채는 사이 순식간에마토 히로카를 한껏 비틀며.

 

코앞까지 들이닥친 감정은 차마 비껴갈 새도 없이 덮쳐온다그때부터 조금씩조금씩 균열이 일었다.

 

이크그렇담 어쩔 수 없죠난 관대한 마토니까 말이지.”

 

비뚜름한 미소고의가 다분한 말말하는 도중 무의식처럼 억눌러 노골적이지 않은 비꼼이었다그래도 네게는 절대 하지 않으리라 생각한 것을 무심코 내뱉어버렸다는 사실만으로 버거웠다……전보다 참기가 더 힘든 것 같아짧게 돌이켜 보니 정말로 그랬다어쩌면 내가 한계에 몰려있는 건지도 모르겠다고그런 생각이 스쳤다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다가 잠잠해지면 다행이었지만그 이후로 예측할 수 없는 순간에 닥쳐올 상황이 눈에 훤하니까두려움혹은 걱정이었다.

 

말을 골라 차분히 늘어놓는다절친한 친구친애하는 사람갑작스러워도 짜증 나지 않는 존재.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사람’ 같은 건 스스로가 먼저 부정했다대답을 모르니까거부당할까 봐전부 네가 내어준 것이고 서로가 그어놓은 한계인 것만 나열했다어린아이 같은 투정이다상처 입고 잔뜩 가시를 세운 채 몸을 웅크린다자기방어적인 심리였다.

 

하아옅은 한숨으로 말이 끊어진다얼마 안 있어 네가 입을 열었다.

 

너무 충분해서진심으로.”

 

잔잔한 미소목소리덧붙여서.

 

진짜 기뻐절친한 친구라감동적인 수준인걸… 네게 그런 말 들을 정도로 잘난 사람이 아닌데… 다섯 손가락은 역시 무리였나 봐어쨌든영광일 따름이야역시 내게 너무… 과분한 것 투성이네.”

 

애써 미소를 그려내서 네게 시선을 뒀다유이토의 말을 곧이 고대로 받아들이기가 힘들다그래좋아해 주는 것 같아 다행이네과분까지는 모르겠어난 진실하거든하지만 방금 내가 한 말이 정말 바라던 대답이었던지진심인 건지 사실 조금은 의심스럽네지금 같은 모습은 내가 줄곧 보아왔던 거잖아안 그래유이토.

 

무엇이 속마음이고 네게 전했던 말인지 상념에 잔뜩 얽혀들어 구분해내기조차 어렵다헷갈렸다이러면 안 되는데.

머릿속으로는 이미 수십 번이고 수천 번이고혹은 그 이상으로 네게 사랑을 고백했다태연한 얼굴로 웃고 속으론 연신 네 이름을 부르고 눈앞에 널 보며 그리워했다안고 가야 할 것과 네게 전할 말을 구별하지 못하고 한꺼번에 쏟아냈다면 진즉에 거부당하고 끝났을 거다조금만 들춰내도 바로 알아차렸을 감정이었다그래서 네 앞에선 늘 차분해야 했다가능한 이성을 붙잡고 늘 여유롭게그게 안 되면 네 차분함을 흉내 내어 자신을 억눌렀다.

 

일말의 희망을 품었다나와 똑같진 않아도 어쩌면 조금은그 일부쯤은 비슷할 거라고목소리시선눈의 깜빡임미소 짓고 시선이 얽혔던 횟수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으나 전해지는그런 것닿을 것 같으면 조금 일렁이다 서서히 희미해지고떨어지는 순간 곧 담담하게 전해오는 음성그리고 완전히 사라진다.

 

진심을 엿보아도 얘기할 수 없었다넌 마치 이 거리를 유지하고 싶어 하는 사람 같았다발견하는 순간마다 마토 히로카는 무너졌다침묵에 잠겨 절망했다네게 왜 그러냐며 소리칠 수도 없는 처지다불안하고조바심이 들고아무리 원망스러워도거기까지가 내 위치의 한계 같았다확인하려 들지 않았다.

 

도대체 왜너도 날 좋아하잖아그래서 네가 먼저 말해주길 바랐다조심스럽고 아주 천천히 다가가 겨우 가까워졌는데 단박에 타인으로 밀려나고절망하고 미워하다 결국 그 모든 걸 사랑에 들이고 다시 발을 뗀다수천 번의 물음을 밀어 넣고 지워내기를 반복하다 겨우 하나를 골라 입 밖으로 낸 질문엔 대답이 없었다흐지부지 넘어갈 때 내 심정이 어땠는지.

 

티가 났나 보네진짜 과분해진심이고.”

그러게티가 났나 봐.”

 

미소를 띠고 담백하게 말했다.

 

티가 나면 안 될 텐데좀 더 노력해야지그래서 전혀 모르도록 해야 할 텐데맞지?”

 

겉과 속의 간극이 극에 다다른다거듭되는 것이 힘들다일상이다네 생각에 머리가 욱신거릴 정도다입술을 깨물었다널 바라보기 힘들어 고개를 돌렸지만머릿속에선 선명히 그려졌다무의미했다갑갑함에 머릴 쓸어 넘긴다어느새 멈추다시피 했던 호흡을 깨트렸다한숨이 나왔다.

 

아니유이토는 지금도 잘 모르겠는 걸확신이 안서거든그래서 너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은데 넌.”

 

평소보다 말이 빨랐다아랫입술이 아프다억지로 참고 끌고 온 것의 일각이 드러났다.

 

넌 늘 내치는 것이 아니라 한 편을 내어줘서 그에 안도할 때면네게는 항상 내가 모르는 다른 부분이 숨어있었다다 내어주길 바란 건 아냐다만 유이토……널 완전히 알아내길 바랐던 건 내 지나친 욕심이었을까그것이 네 상냥함이었을지는 몰라도 때론 배려에 숨이 막혔다이기적인 사람이라 조금만 아파도 네 속을 가늠할 수 없던 탓에 더욱더 심했다드러낼 수 없는 연정에 통증을 느꼈다.

 

흐리게 웃는다눅눅한 감정에 녹아들고. "유이토는 가끔내게 너무하니까." 주절거림.

 

오롯이 드러낸 파란 눈동자를 좋아한다따뜻하고 때론 더위를 식혀주던 손의 온기도잠시나마 닿았던 얼굴마저도막연히 네게 가까워지고 싶단 욕망은 널 사랑한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전부 해소된 적이 없었다그래서 자꾸만 욕심이 난다.

 

손을 뻗는다볼이 닿았다손끝에 귀가 스치고천천히 들여다보던 시선을 멈췄다지금까지 숨겨왔던 모든 것이 범람한다지금의 나는 어쩐지 충동적이었다앞으로 내 입에서 나올 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겨우 세 음절의 한 마디우리 사이를 변화시키기 충분하지만이 말을 뱉는다고 해서 지난날의 세월이 전해지기엔 충분하지 않을 터였다모든 것을 담고 울릴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리고경이롭던 것그 감정들어떻게 오롯이 전해질 수 있을까.

저린 마음을 토해냈다.

 

 

"유이토좋아해.”

 

 

 

 


 

 

 

어쩌면 그 말은내게 있어 사형선고와 동일한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무슨 뜻이야?”

 

여태까지의 잘못이 이런 식으로 돌아올 줄은 정말정말 상상도 못 했기에 내뱉으면 끝일 줄 알았던 내 어리석음을 탓해야만 했다.

 

어떤 의미인 거야히로카.”

 

탄식을 삼킨다심연으로 끌어내려 진다나름의 각오 끝에 내뱉은 말에 되돌아온 질문은 조금 전과 겹쳐지며 숨이 턱 막혀온다눈앞이 뿌예지는 기분이었다.

 

유이토넌 왜……네 잘못이 아닌 걸 아는데도 괴로웠다독하다어긋났다는 이 상황이네게 향하려던 원망의 화살이 돌연 뚝 끊어졌다네 앞에만 서면 어떤 상황에서도 차분하려 했던 게 버릇이 된 덕이었을까거꾸로 된 살을 쏜다좋아한다고 말했는데이제야 겨우 드러낸 감정이 빗겨나간 걸 네 탓으로 돌려도 되는 걸까.

 

속이 따끔거렸다.

 

내가 널 이렇게 만들었어우리가 서로를 이렇게 만들었을까난 정말그동안혼자 고생했다고 생각한 것이 무색하도록 같은 통증을 겪었던 걸까지독하게 파고드는 통증을 피하고 싶어 의심을 먼저 내세우게 됐던 것도너 역시 겪고 있던 거였을까.

 

홀로 궁지에 몰려있다고 생각했다양방향이라는 가정을 믿더라도 실질적인 외사랑이라 생각했다그렇지 않고서야 버틸 수 없었으니까하지만 만약에정말로 내게도 조금의 가능성이 있다면…….

 

네 갑작스러움은 싫지 않아언젠가 들었던 네 말이 떠오른다마지막이 되더라도 받아들이자는 결심은 네 앞에서 무용지물이 됐다네 앞에서 그렇게 차분하려고 애를 써도 언제 한번 안 흔들린 적이 있던가말 한마디에 수없이 천국과 지옥의 경계를 흐려놓았는데이제 와 겁난다 해서 어쩔 도리가 있을까……결국 웃는다.

 

도망가지 마물러서지 마거부하지 말아줘무의식이 반영된 움직임으로 유이토의 뒷목을 받치듯 감싸 쥐었다엄지로 입술을 뭉근히 누르고당장에라도 입 맞출 것을 초인적으로 참아가며 거리를 좁혔다찬찬히 들여다봤다콧대를 따라 내려가고볼을 쓸고귀에 스치고시선과 손으로 함께 쓸어내린다처음이 아님이 감사하고 그 사실이 어쩐지 기뻤다강압적이지 않기 위해 힘을 풀어버리니 속이 배로 떨려왔다.

 

유이토희망은 나를 죽여.”

 

이러면너는 도망칠까줄곧 거리를 유지하던 너이니 이번 역시 밀어낼지도 모른다내가 멋대로 가까이 다가갔으니그것도 호흡이 겹쳐지고 온기가 느껴지는 코앞까지 좁혀버렸으니 아예 거부해버릴 수도 있었다그럼 우리는 영영 끝일 것이다우리 관계에서 선택권은 유이토의 것이었다적어도 내겐 그랬어네가 내어주는 칼을 기꺼이 목에 댈 것이다더는 친구라는 허울 좋은 사이로도 남을 수 없을 거였다어차피 유리 발판 위의 위태로움체념으로 끝난다 해도 상관없지 않을까.

 

 

아니아니사실은 그렇지 않았다명백한 우문이다그 기억들에 이름을 붙인다면 행복이어야만 했다애정으로 가득 찬다네 이름 세 음절이 찬란하고 아득하고 그립다종이 위에 써지는 이름마저도 닳을까 봐 애가 탔다유이토입 밖에 내지 못하는 부름만 몇 번이었는지모든 걸 채우진 못했지만속에서 찰랑이는 감정은 그 순간의 나를 미소 짓게 했다심장의 울림도분위기도네 전부는 몇 번이고 사랑에 빠지게 했다다만 나는 이 웃기지도 않는 가면도 지쳐서더는 견디기를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유이토어쩌면 좋지나는 길을 잃어버렸어네가 손을 잡아주지 않는다면 서서히 죽어가겠지곯아 터진 마음으로 태연함을 가장하고 사랑하는 이를 마주하고 웃을 텐데서로 다른 진심으로 미소 짓는다는 가정은 통증만 남겼다짐작이 사실로 다가올 때면 또 한 번의 단편적인 죽음을 맞이할 터다이상하게 그걸 인지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조금이나마 차분해질 수 있었다그를 마음에 들였던 탓인지 특유의 차분함마저 전염성 짙게 옮아왔다내게 치는 파도조차 사랑했지만차라리 완전히 감정에 적셔져 모든 걸 고백하고 싶은 적이 한둘이 아니었다거센 물살에 몸을 맡기고 싶었다하지만 그러질 못했다.

 

네가 내린 침묵에 잠긴다그 아래서 네 이름을 되새겼다입에 익은 소리는 몇 번을 불러도 아쉬움이 남아서유이토이름 한 번에 기억 하나꽉 채워서 내게 온다눈이 시리다목이 멨다마지막이라는 가정은 끝내 네 이름을 부르게 만든다그때였다.

 

네가 내게로 손을 뻗는다.

 

유이…….

 

부름이 끊긴다말이 부서진다거리가 좁혀지고어느 때보다 가깝다닿은 곳부터 조금씩온기가 번진다낮은 음성이 귀를 간지럽혔다.

 

그건 내가 늘 하고픈 말이었는데.”

 

숨을 멈췄다온기감촉목소리평정을 연기할 수조차 없이 바라던 것은 비현실적이다바라던 것이 이뤄지던 꿈이 연상됐다네가 다가왔던모든 게 이뤄지는 장소이 순간도 꼭 꿈같았다지독하게 현실적이고그리하여 비현실적이다혹시 정말 꿈이 아닐까허망하게 사라져버릴 붙잡을 수 없고 닿을 수 없는 것.

 

히로카.”

 

절대 그럴 순 없었다부유하는 감각을 떨쳐내고자 네게 손을 뻗는다허리에 팔을 둘러 껴안았다소중하고 또 소중해서 부드럽게 감싸듯이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사이로 스친다얽히도록 끌어안았다견고한 네가 나약한 나를 지탱해준다고개를 떨궈 네게 기대고간절히 잡았다몽롱한 열기가 전신을 사로잡는다벅찬 한숨엷은 떨림나직하게 전하는 속삭임또 한 번의 진심.

 

좋아해.”

 

환희절망애달픔충족감간절함원망그립고아득하고경이롭고깊이 새겨진 감정들그리고 우에다 유이토이 모든 감정의 근원지이자 내가 사랑할 수밖에 없던 사람.

 

네가 나랑 같다면 말야… 나도 좋아해히로카.”

 

정말로영원 같은 찰나다.

 

 

 


 

 

 

 

나의 체온은 곧 네 입술의 온도가 되고,

불현듯 네게 입을 맞추고 싶어진 것은 비밀로 하자

/ 태풍의 눈, 서덕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