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당신보다 아름다운 목소리를
난 지금껏 들어본 적이 없다
이 목소리로 내 이름 한 번만
나긋하게 불러주면 나는 더 바랄 것 없겠다고,
내가 다 침몰해도 좋겠다고
|세이렌, 서덕준
※ 자캐 '마토 히로카' 고백로그
※ '교실 뒷편에는 천사가 묻혀있다' 기반 커뮤 자캐로, '이지메, 가해' 등의 언급이 존재합니다. 러닝 당시와 글을 올리는 현재 시점에 N년의 간극이 존재하며, 오너는 '교뒷천'이 비윤리됨을 인지하고 있으며 소비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현재에서 과거 그리고 미래까지. 중학교에서 고등학생으로. 어른으로 한 걸음 내디디며 피어난 변화는 높아진 눈높이, 한층 더 낮아진 목소리 같은 신체뿐만이 아니다. 변화가 일던 순간들. 흘러간 시간 속에 스며들어 있는 네가 눈에 밟힌다. 가슴에 들어찬다. 우연찮은 깨달음은 영원히라도 될 것처럼 깊이 새겨졌다. 단 한 번 되새기기도 벅찬 감정에 세월이 무게를 더하고, 속에서 한가득 찰랑인다. 시선이 마주친 순간 손길로 전해진 네 온기. 그리고 네 세상 안에서 빛나던 눈동자, 푸른빛의 시선. 그게 왜 그토록 저릿한지.
01
기억 속 너와 내가 존재하게 된 순간을 밟아본다. 중학교 2학년. 더위가 발을 들일 무렵, 어른이 되지 못한 어린 내가 추구했던 것은 가히 쾌락 주의자를 모방했다. 즐거움을 위해선 흥미로운 소재와 흘러가는 사람이 필요했고, 기쁘게도 스스로가 속해있던 2-A반은 만족스러운 환경이었다.
시끄러운 분위기, 끊이질 않는 소음, 모범적이고 착한 천사 같은 아이들…. 그리고 그런 천사들이 주도하는 이지메까지. 개중엔 마지막이 걸작이다. 평화로운 일상에는 자극적인 진실이 숨겨져 있었다. 일탈의 감각. 놀이는 정말 그뿐이었다. 이지메라는 단어를 벗어난 또 다른 무언가. 어릴 적부터 귀에 딱지가 박히도록 들어왔던 그릇된 행동 따위보다 훨씬 구미가 당겨오는 게 당연했다.
어쩌다 한 번씩 네 옆을 스쳐 갔다. 우에다 유이토. 동급생에 같은 반 친구로서 가벼운 말 한마디나 주고받는 사이. 누구와도 할 수 있던 이야기는 다시 훑어도 빠르게 지나간다. 그러다 정말 우연하게도 한가한 우에다 씨, 한가한 마토 씨. 장난 가득한 수식어다.
“오히려 그건 마토지.”
“뭐어? 내가 잘못 들은 거 맞지?”
“귀가 안 좋은 거야? 걱정이네. 병원이라도 가보지 그래.”
“이것 참……. 걱정해줘서 고마운 걸, 친절한 우에다.”
“뭘.”
태연히 대꾸하는 네게는 웃음기가 스며있었다. 타인에 대해선 어떤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던 내가 왜 그와의 대화는 계속해서 이어갔던 건지, 계속 한마디를 건넸던 것인지 스스로도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글쎄. 그런 사람이 처음이었던가?
'평범해 보여도 이지메나 개놀이에 침묵하면서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사람이고, 입맛 특이하게 팥빵이나 녹차 맛 하겐다즈를 좋아하고 리듬 게임을 즐겨 하는. 아, 그리고 안경이 잘 어울린다.’ 다소 조화롭지 못한 긴 수식어를 지닌 동급생은 그때까지도, 그리고 지금까지도 유일하다. 당시엔 하나를 알아갈 때마다 새로웠다. 그와 친해지는 데에 있어 본래 타인에 대한 선입견이 깨지며 더욱 흥미가 동한 점을 부정하진 않는다. 표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 상대적으로 차분한 농담이라니? 이상하게도 무척 잘 어울렸다는 점에 주목한다. 단순히 주관적인 평가일지 객관적인 사실인지 판단할 기분은 아니었다. 소위 요비스테를 했을 때도, 한 마디 두 마디 사이에 자연스럽게 더해진 세 음절에 은근히 웃고는 자신 또한 친근한 호칭을 부르지 않았던가. 애당초 스쳐갔던 생각이지만 먼저 움직이지 않았던 것을, 선뜻 손을 내밀어오는 모습은 호감을 불렀다.
천사 같은 2-A반. 아이들이 깊숙이 숨겨놨던 비밀은 각각의 가치마다 다르게 평가됐다. 누군가는 놀이로, 혹자는 이지메보다 질이 나쁘다 외치며 주동자들을 비난했다. ‘용감하네. 박수라도 쳐줘야 하려나?’ 같은 생각만 들 뿐이지만. 의도가 정의구현이었든 죄책감에 비롯한 행동이었든 간에 뒤늦게 행하는 정의가 폭력으로 변질될 수 있음을 그들은 미처 몰랐던 모양이다.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것이 어리석을 만큼 반발은 극심했고 소수는 다수에게 묵살 당했다. 누구라도 인생에 빨간 줄이 그어지는 걸 반길 리 없었다. 사세 당연했다.
"어떻게 생각해?“
우에다가 되물었다. 현재에서 한 마디를 거슬러 올라가면 우에다의 관념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고, 그것이 나와 반대되는 입장이란 것도 짐작 가능했지만, 대답에 망설임은 없었다.
"물지도 못할 바엔 짖지도 말아야지.“
아, 분명하게도 우린 달랐다. 넌 암묵적인 사람이었지만, 불현듯 나타난 개놀이는 너와 나의 차이점을 드러내는 것이다. 대립 되는 이념은 타인을 갈라놓기에 탁월한 것일지라도 우연의 일치인지 서로를 부정하지 않았고, 우리는 눈을 감았다.
흐드러지게 핀 벚꽃이 하나둘씩 떨어지는 순간을 교실 창문 너머로 발견한다. 일과의 마지막 수업은 몽롱하다. 턱을 괴고 나른함에 젖어 늦은 시침을 재촉하고. 눈동자는 내 의사를 무시하고 목적지를 정했다. 움직임이 느릿하다. 시야를 검게 물들였다. 시각을 제외한 감각이 예민해진다.
닳은 심. 속살거림. 두근거림. 공기 중에 퍼져있는 분필 냄새가 바닥으로 가라앉고, 샤프심이 하얀 종이에 마찰하는 소리가 귀에서 작게 진동한다. 살랑거리는 바람에 커튼이 흔들리고 상념과 함께 쓸려간다. 시간을 따르는 잔상이 선명해진다. 수면 위 파동이 잔잔해지면 뚜렷한 달이 그려지는 것처럼. 조금씩, 조금씩. 내가 무지했던 것.
유독 웃음이 많았다. 이따금 시선이 머물고, 또다시 웃는다.
친구라서 그런 걸까.
학교를 벗어나던 귀갓길에 네 생각이 났다. 집에 돌아가 옷을 갈아입다가도, 잠을 청하려 침대에 몸을 뉠 때도. 하루 24시간 중 1분에는 네 생각이 베여있었다. 그 1분이 반복된다. 수십 번을 일과처럼.
이게 정말로 친구가 맞을까.
눈을 뜨고, 깜빡였다. 흐른 시간 1분. 시선이 멈춰있던 곳은.
유이토
단 세 음절이다. 써 내리면 흔적이 남고, 만족할 때까지 적다간 닳을까 싶어 한 자 적지도 못하고 펜을 내렸다. 하얀 종이 위 투명하게 새겨진 몇 자.
고요한 부름이 달다. 여린 호흡이 입술 사이로 샜다.
봄에서 여름으로. 아침에서 저녁으로 넘어가고 졸음이 몰려오는 시간. 학교에서, 교실에서, 책상에 앉아서, 잠에 취해 수업을 듣다가, 문득 너를 발견하고.
사랑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어릴 때 책 좀 더 읽을 걸 그랬나. 현재 나의 어휘로 내 심정을 고스란히 표현하기란 불가능에 가깝기에 줄곧 멍하니 창밖을 보다 혀를 내차며 자책하곤 했다. 그럴수록 떠오르는 건 조곤조곤 의미를 담아 늘어놓던 너의 말. 목소리는 잔잔함을 담고 울려 전달력도, 들을 때의 느낌도 좋았다. 그런 목소리에 장난기가 섞여들 때면 그래서인지 조금 더 즐거웠다. 그의 말이 더욱 선명히 기억에 남는 이유 중 하나라 짐작한다. 상념은 널 닮아 잔잔했다.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너니까 당연한 걸까. 입안에서 맴도는 것이 포근하게 내려앉는다. 기도를 타고 내려가 심장에 닿고, 박동이 일정하게 울려 퍼진다. 이 현상의 원인이 무엇인지 이제는 알고 있었다.
좋아하는 마음에 몸이 멋대로 구는 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건지. 처음 깨달은 것은 낯설었다. 제대로 인지하고 받아들였는데도 그렇다. 솔직해지자면 이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원래 이런 건지 알 수조차 없으니…… 조금쯤은 억울해해도 되는 걸까.
마토 히로카가 우에다 유이토를 좋아한다. 문장처럼 간단했다면 좋을 텐데.
가을의 불그스름함이 완전히 저물 때까지.
상념이 길어진다. 널 떠올리고 있어.
꽃이 피고 진다. 중학교 3학년. 가장 덧없이 흘러간 한 해였다. 이미 속에서 싹 틔운 것을 가벼운 감정이라 칭하고 네게서 차차 멀어지려 했던, 아마도 감정을 끊어내려 했던 시기. 계기는 생각보다 단순했다. 그냥, 학교에서 학생들이 나눌 법한 숱한 이야기 중 하나를 들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지 못했을 뿐.
“너 게이야?” 한가득, 웃음이 담겨서. 농담으로 취급된 말에 욕설로 가득한 답이 돌아왔다. 모든 게 자연스러웠다. 당연하게도 배척당하는 것이었다. 내가 품은 건.
동성애에 대한 시선이 썩 좋지 않다는 것은 어린애도 안다. 보편적인 부모를 뒀다면 더욱 확실히 박혀있을 테다. 나의 부모님은 확실히 보편적이지 않았다. 나는 그랬지만, 유이토는 모른다. 내가 아는 그라면 편견은 없겠으나 심증뿐이다. 확실치 않았다.
혹시라도 아니라면. 만약, 네가 거부감을 가진 상태에서 내가 품은 것을 들키기라도 한다면?
여태 쌓은 관계마저 틀어질 가능성이 있는 사고는 절연이란 리스크까지 안아가며 부정할 가치가 없었다. 본인에게 물어본다는 여지마저 없앴다. 우릴 수식할 관계라 해봤자 겨우 동급생, 친구. 그마저도 학교를 벗어나면 금방 끊어지고 완벽한 타인이 될 것이 분명하니 지레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아쉬움만 가득한 친구 사이지만 너와의 인연을 끊는 건 바라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지워져야 할 것은 나의 감정이었다.
한 끔도 남겨두지 않고 감정을 소모하는 것이 힘들 거라 짐작했던 것만큼, 1년이라는 시간은 느리지도 않았으나 짧지도 않았다. 가볍게 떨쳐낼 수 있다, 그리 생각했는데. 네 흔적을 쫓는 것을 인지하고 눈길을 돌리기만 수십 번, 의식적으로 멀리하기를 수십 분째 하는 자신을 떠올리면 생각을 달리할 수밖에 없었다.
숨기자. 적어도 네게 들켜서 멀어지는 일이 절대 없도록.
네가 허락한 이름을 계속 불렀다. 하지만 그마저 벅차기 시작하자 당혹스러워진 마토 히로카는 입을 잠그고 과거의 둘을 흉내 냈다. ‘유이토’가 아닌 ‘우에다’. 어느새 낯설어진 소리. 예전엔 잘만 불러놓고 왜 이제 와서 버겁게 느껴지는 건지.
역시 하루빨리 네게서 멀어져야 한다. 그래야만 했다. 버리지 못한 감정이 1년 동안 쌓이고 쌓여서 터지지만 않았다면, 고등학교가 달랐다면, 그리고 너를 다시 만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가능성이라도 남아있었을 텐데.
키가 자라고, 목소리가 변하고. 어쩐지 기억 속과 다른 모습이었던 너. 아차 싶던 순간. 감정에 떠밀린 어느 봄날의 끝에서 나는 네 이름을 부른다.
안녕, 유이토.
너는 그대로야. 아니, 변했네. 아쉽다. 예전에 넌 조금 더 귀여웠어. 반응도 그렇고. 사실 지금의 넌 조금 곤란해. 내가 사랑한 모습에서 더욱 성장한 너는…….
진학이 무색하게도 새로 오른 고등학교는 전혀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익숙했다. 마치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내가 멀어지려 했던 당시에 시간이 멈춰있다 이제야 흐르는 건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도 들었다. 유이토가 있었고 개놀이도 다시금 시작됐다. 즐거운 일임은 당연한데 어딘지 묘했다. 처음은 몰랐지만 이젠 알기 때문인지. 차이점이란 게 썩 맘에 드는 건 아니었다. 적어도 너와 비교했을 때는.
벌써 두 번째다. 이젠 서로에게 어떤 생각이려니 하는 그런 질문조차 불필요했지만, 개놀이는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불현듯 과거를 떠올리게 만드는 소재였다. 서로에게 침묵한 순간은 잊히지 않고 남겨졌다. 그러면 개놀이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는가? 그렇진 않았다. 개놀이를 놀이로 즐길 의향, 이번 히어로는 어떻게 나올지 상상하는 즐거움도 그대로였다. 마토 히로카는 달라지지 않았다.
두 번째 개놀이.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번 역시 소수는 절망했다. 전과 똑같았다. 애초에 잘 이끌고, 잘 이끌려가기만 하면 손해를 입을 놀이가 아니었으니 자신도 동참했던 거고. 그런데도 내겐 지난번과 완벽히 똑같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두 번째 개놀이에서, 나는 언쟁을 제외하면 어떠한 주동도 없이 얌전히 굴었다. 처음이 아니었기에 심심했던 건지 흥미가 식었던 걸까. 어쩌면 전혀 다른 곳에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정말로.
뚝. 상념을 끊어낸다. 희미하게 떠올린 정답을 다시 끝까지 밀어 넣는다. 조금만 늦었어도 선명하게 드러난 것에 홀로 몇 번이고 후회했을 게 눈에 훤했다. 이런 식으로 상념을 끊어낸 적이 지나치게 많았다.
‘좋아해.’ 이 이상의 감정을 생각에조차 담지 않는 이유는 감당 못 할 만큼 크나큰 것이 되어 찾아올까 하는 우려다. 예방책이었다. 지금도 이런데 가뜩이나 더 깊어져 버린다면? 예감마저도 쓰리다. 상처투성이에 가시 박힌 손으로 심장을 움켜쥐는 느낌이 희미하게 찾아온다. 마음을 끌고 온 시간도 길어서 이기적인 사람은 힘든 기억만 가득이었다. 내가 이렇게 나약한 사람인 줄은 몰랐는데……. 또 하나를 너로 인해 깨닫는다. 하여간, 너는 무엇이든 베푸는 사람이다. 늘 그랬다. 모호한 말을 가만히 웃어넘기면 벼랑 끝자락으로 한 발자국 밀린 기분에 너와 나 사이의 거리를 가늠해본다. 안 보이는 선을 긋고 감정이 날뛰는 것도 무시한 채 한없이 가라앉아 은근한 질문만 되묻기 일쑤였다.
반복되는 일련 속에서 계속 생각했다. 절대 착각해서는 안 돼. 네가 베푸는 상냥함에는 진한 고통이 뒤따른다. 가끔 네 반응이 친구를 향한 건지 혹은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 이에게 보여주는 건지, 말도 안 되는 억측을 넘기지 못하고 괜한 희망을 품게 되는 것도 곤란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네가 상냥하길 원했다.
친구고, 이념이 대립했고, 제멋대로인 나를 유이토가 아니면 누가 받아줄지 모르겠는걸. 그러면서 깨달았다. 어느샌가 난 네게서 떠날 수 없는 이유를 찾고 있었고, 처음에 했던 짓궂은 농담도 더는 하지 못했다.
네가 좀 더 가까운 곳에 있길 원한다.
대화가 길어질수록 감정을 숨기기 어렵다는 걸 깨달았다. 친구 사이에서 드러낼 수 있는 호의도 요즘 들어 선을 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멈춰야 한다고 생각은 하는데 그러질 못해서 종종 스스로를 책하는 경우도 생겼다. 그러던 참에 네가 자신을 고작이라 칭했고, 내 일과를 마음대로 뒤바꿔놓은 장본인에게서 그런 소리를 들으니 다소 아연했다. 친구의 자격을 빌려 가며 아쉬운 대로 본심의 한 귀퉁이도 안 되는 것만 얘기하며 지내왔는데……. 그런데 이건 뭔가 억울하지.
어느새 대화는 일과가 됐다. 타인에겐 하지 않을 낯간지러운 말을 진심으로 뱉는, 그런 대화.
유이토가 볼을 쿡 찔러왔다.
“뭐야… 왜 찔러.”
“그냥. 보기 좋아서. 별로였어?”
물론, 잘 어울린다는 말에 웃던 거지만……. 당황하면 생각조차 흐려질 수 있단 걸 그때 깨달았다. 호의가 담긴 네 대답에 조금 놀랐다. 기뻤고, 당연하게도 별로였을 리 없다. 평소처럼, 서로에게 잔뜩 좋은 말만 들려주느라 부드러운 분위기에 무엇보다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의 칭찬이다. 기분 좋은 설렘이 들어찬다.
“아니, 살짝 놀랐을 뿐인데?”
미소가 완연해서 자제하지 않으면 금세 들켜버릴 만큼. 친구일 뿐이라도 곁에 남아있으려는 내겐 굳이 내칠 이유도 맞장구치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장난을 기회 삼아 볼을 꾹 건드렸다. 그랬더니 정말,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을 유이토가 해 와서……. 유이토에게 볼을 꼬집혔다는 사실은 마토 히로카를 깨나 당황케 했다. 물론 아프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간지러웠지 내심 놀랐지. 어쩐지 유쾌한 기분에 휩싸이고 만다. 먼저 거리를 좁혀온 것이 이렇게나 기쁘다. 그렇게 1분, 2분. 어느새 유이토의 볼을 아프지 않게 주욱 늘리고 있었는데, 그건 아마도 내 말을 부정한 네게 작은 심술을 부리고 싶어졌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만약 남이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을 본다면 바보 같다 하며 비웃을 게 뻔한데.
“응. 진짜로 됐어. 그럼 된 거지, 유이토?”
유이토가 손을 움직였다. 시선은 그대로다. 네 손이 점점 가까워진다 싶어 살짝 눈을 크게 떴을까. 곧 볼에서 따스한 감촉이 느껴졌다.
“따뜻하네. 응, 됐어. 정말로.” 짤막한 미소. 그리고.
“이제 됐어. 정말 좋아.”
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다. 얼굴이 화끈하니 달아오른다. 불에 덴 것처럼 빠르게도 붉어지는 게 느껴졌다. 일부로 시선을 어긋 냈다. 심장이 요란스럽게 울려댄다. …어쩌면 좋지. 볼을 주욱 늘린 탓에 웃음소리 사이로 뭉개지는 말이 자꾸 스며든다. 따뜻했던 체온이 어느새 시원하게 느껴진다. 선명히 마주친 파란 눈동자. 손의 감촉. 웃으며 살짝 벌려진 입술. 전부 나를 향한 것들이다. 정말 예뻤다. 사람이 이렇게 예쁠 수도 있다는 걸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단순히 외적인 것과는 조금 다른, 널 빛나게 하는 것. 유이토에게 실례일 지도 모르는 생각이 멈추질 않았다. 좋아하는 이의 그런 모습은 답지 않은 충동까지 벌컥 들게 할 정도로, 진심으로, 예뻐서……나는.
어쩐지 목이 멨다.
“…유이토. 시력 안 좋았던가.”
들키지 않아야 할 텐데.
다급한 마음에 숨기려 드니 몸이 멋대로 움직였다. 아주 짧은 순간. 어떠한 가림도 투영도 없이 온전히 드러난 푸른 눈을 마주하고 나서야 제 손에 들린 안경을 인식하고, 상당히 무례한 짓을 저지른 걸 깨달았다. 미안하다. 그리고 묘하게 만족스럽다. 눈동자가 드러나는 게 좋은 걸까, 난. 살짝 고개를 숙였다.
히로카, 목소리가…….
목소리가 귓전을 두드린다. 여느 때처럼 너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생뚱맞게도 네가 여전하다는 것에 왠지 모를 안도감까지 들었다. 이상한 타이밍이지. 심장의 두근거림도 분위기 또는 네게 동화되어 묵직하지만 포근하게 울린다. 널 좋아한다는 첫 번째 증거는 조금 괴롭더라도 더는 무겁지만은 않았다. 어쩌면 어느 정도 이 상황에 익숙해졌기 때문일지도 모르고.
윤곽만 보인다는 네 말에 조금 안심했다. 적어도 감정이 다 드러나는 얼굴은 보여주는 추태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으니까. 무심코 다행이라 말하고 나서는 조금 아차 싶었지만.
“여전히 따뜻해. 오히려 더울 정도로.”
“더울 정도야? 기분 탓이 아닐까.”
“그래. 다 기분 때문이겠지. 날씨도 이젠 시원한데.”
네 손등을 검지로 한 번씩 두들기기도 하며 천천히 쓸어내렸다. 온기가 존재한다. 네 손에 닿았을 뜨거움을 기분 탓으로 돌리고, 내 억지도 유이토가 수용해주니 걸림돌 없이 흘러갔다. 지금처럼 네가 조금 더 상냥하게 느껴질 때면 응석을 부리고 싶어진다. 무슨 어린애라도 된 것 같아. 네가 날 그렇게 만들어. 유이토. 속으로 슬쩍 웃어넘긴다.
몇 번의 대화가 오고 간다. 얌전히 기대어 묘하게 솔직해져 있는 내게 넌 “정말 기분 좋아?”라고 물으며 눈가를 쓸어내렸고, 그 순간 속이 조금 울렁거렸다.
농담을 던졌다. 일부로. 속이 묵직하고 이상하게 울렁이니까. 저릿한 느낌을 모르는 척했다. 농담을 관두고 솔직한 심정을 담은 말끝에 탄식이 뒤따랐다.
그리고 돌아온 네 대답은 조금, 곤란하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이쯤 되면 모르는 게 이상하다.
마토 히로카는 바보가 아니라 관심을 가진 상대의 변화를 그저 흘려보내지 않았다. 유독 상냥했고, 웃음이 많았고, 종종 말을 흐렸다. 그 당시의 말과 상황이 네 머뭇거림이 속내를 대신했을 것이라 짐작한다. 그래서 더욱 네 얘기에 굶주렸다. 물론 직접 들을 수는 없었지만, 애초에 완벽한 타인이었다면 더 빨리 알아차렸을 것을. 물론 마토 히로카는 우에다 유이토의 타인이 아니고 또 신중할 수밖에 없는 감정이었으니까 늦은 것도 어쩔 수 없었다.
달콤한 가정이다. 자기만족이려나. 섣부른 판단일지도 모른다. 착각이라면 정말로 곤란했다. ‘사랑에 눈이 멀어 어리석은 짓을 저지른’. 어느 연애 소설에나 나올 법한 사람은 싫다. 섣부른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우에다 유이토 곁에 있을 마토 히로카는 그래선 안 됐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확신할까. 아마 그건, 상상만으로도 한가득 흡족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겠지. 네 앞에선 나약한 마토 히로카라서 그럴 것이다. 부정하고 싶지 않게 된다.
일과를 정리하고. 편안히 누운 채로 작게 웃음을 흘렸다. 예전이라면 상상도 못 할 모습인데. 또다시 너로 인한 변화다.
자그마한 행복이었다. 반면에 그림자 또한 짙어지고, 불안을 비롯한 의문 또한 피어났다.
연정인데도 어긋난다면……, 평행선? 하지만 멀지도 않은데. 그럼 우린 지금 등을 맞대고 마주 보지 않는 건가. 잔인하네.
너를 만나고 계절이 달라졌다. 교실의 아이들도, 등하굣길의 풍경도, 감정의 농도까지도 전부. 모든 게 달라졌다. 너와 나를 제외하면, 그래. 우릴 제외한 전부 말이다.
어째서. 왜? 대체 무엇의 연장선일까. 한 번 떠오른 의문은 끈질기게 따라붙는다. 이미 오랜 시간 끌어왔다. 적어도 전에는 지금처럼 노골적인 물음은 아니었는데 기나긴 침체가 이런 결과를 부른 걸까. 세월과 비례하게 서서히 조여 온다. 허나 이 부정적인 것은 단번에 크기를 불러 찾아올 수도 있었다. 그러니 완전히 잠식되기 전에 솔직해지길 바랐다. 간단하고도 어려운 얘기다. 상상조차 벅찬 것이 바로 너였다.
배려로 가득한 네 호의에 이기적인 사랑을 품게 된다. 무덤덤하게 죄악감을 받아들였다. 가능했다. 내겐 이런 감정은 처음이고 너도 날 좋아한다면, 양방향이라면 용서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넌 정말 상냥하니까. 그 사실은 도피처가 되고 때론 책망의 이유가 되기도 했다. 유독 너와 관련되면 변덕스러워지는 걸 느낀다.
서툰 첫사랑. 달콤한 말로 위장하기엔 메마르고 거칠다. 질이 나쁘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서 나보고 어쩌란 건데…….
하늘을 부유하다가도 한순간에 추락하고, 다시 번복한다. 너와 관련된 모든 일에서 난 수십 살 먹은 어른이 되고, 모든 것에 무지한 어린애가 된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혼란스러웠다. 종잡을 수 없었다.
주위를 둘러본다. 눈에 익은 곳이다. 방과 후의 교실. 아마도 중학교고, 2-A반. 난 책상 의자에 앉아 있었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내 자리였다. 커튼이 휘날리며 햇살이 넘실거리는 빈 교실은 공기마저 온화했다. 봄? 아니면 여름이 되기 직전이려나. 무엇이 됐든 간에 몸의 긴장도 풀리게 만드는 온도였다. 모든 것이 느긋하게 흘러갔다.
아마 이건 꿈이겠지. 한 번의 깜빡임에 가벼운 깨달음.
기억에 남아있는 풍경보다 조금 더 나른하고, 푸르다. 닮았다.
그러니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시야에 아른거리는 인영에 침음을 삼켰다.
“내 꿈에 그만 좀 나와.”
“네가 날 부르는 거잖아, 히로카.”
음성이 와 닿는다. 네 입에서 나오는 내 이름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달았다.
그래. 그 말이 맞지. 어디까지나 여긴 내 꿈속이니까.
마토 히로카의 소망, 소원, 바람 따위를 수용한 무의식이 반영된 장소.
시야를 가득 메우는 것은 내가 사랑하는 색이다. 눈이 살짝 커졌을까. 다시 천천히 멀어졌다. 실제로 얘기를 나누는 것처럼 책상을 사이에 두고, 의자에 걸터앉아 몸만 뒤로 돌린 채 바라보고 있는 꿈속의 너와 마주했다. 상체를 조금 기울인다.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느긋하게 눈꺼풀을 열고, 닫기를 반복했다. 가까이서 들여다본다. 꿈속의 너는 온전히 푸른 눈동자다. 더욱 선명하고 뚜렷하다.
잘 보여?
응. 잘 보여.
그럴 리가. 유이토는 눈이 안 좋거든. 잠시 웃었다. 다소 가깝더라도 안경을 안 쓰고서 잘 보일 리가 없었다.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유이토의 안경에 손댄 적도 있었고. 물론 그 뒤에 깃들던 만족, 충족감. 파란색의 눈은 가끔 마주하는 것만으론 부족했다. 그게 내 생각보다 좀 더 간절했던 것 같고. ……이런 식으로 꿈으로 나올 줄 알았다면 네가 싫어할 짓은 하지 않았을 텐데.
물론 진짜 그럴 자신은 없었다.
“이건 전부 꿈이지. 내가 무슨 짓을 하든, 설령 사람을 죽여도 누구도 내게 뭐라 할 리 없다는 거야……. 그렇지?”
알 듯 모를 듯. 모호한 미소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손을 뻗어 네 손을 잡아당겼다.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어 스치고, 간지럽히다가, 끝내 얽히게 한다. 손바닥이 닿았다. 양손으로 감싸 쥔다. 고개를 떨궈 입 맞췄다. 손가락 하나하나에 가벼운 스침. 소중하다. 곧 희미해질 꿈이어도 이 순간은 생생하게 다가온다. 도리어 비현실적일 정도로. 내가 원하는 모든 것들이 이루어지는 상황이면 위화감을 느끼며 꿈임을 되새긴다. 얌전히 내 손길을 받아 들여주는 유이토라니. 생각보다 욕망이 노골적이잖아, 나.
“……진짜 네가 이럴 리 없는데. 이건 정말 꿈같아서 슬프네.”
자조 섞인 웃음. 꿈속의 유이토는 말이 적다. 대신 시종일관 눈을 마주하고 때때로 손을 내민다. 그 미성을 들을 수 없는 것은 아쉽지만 내가 닿을 수 없는 말만 들려주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사락. 손가락이 닿았다. 익숙하게 눈을 감으며 머리를 스치는 네 손길에 집중했다. 엷은 숨을 뱉는다.
“현실에서도 이래 줄 생각은 없는 거야?”
“현실의 내게 물어보는 건 어때.”
“농담이지?”
“난 언제나 진지했잖아. 히로카.”
헛웃음을 짓는다. 꿈인데도 당해낼 수가 없네.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목소리와 행동이 다정하면 뭐해, 말하는 건 그대로인데. 사실 그것만으로 만족했지만, 뭐……. 꿈이었으니까. 어차피 나밖에 모를 테다.
한없이 길고 짧은 순간이 지나면, 목이 저릴 때쯤 고개를 든다. 동시에 손길도 떨어져 나간다. 시선을 마주하고 아쉬운 웃음을 짓는 널 보고서 이 꿈의 끝을 예감했다.
“자는 건 몇 시간이나 되는데 정작 꿈을 꾸는 건 몇 분에 불과하지. 그거 알아? 평소엔 아무래도 상관없는 게 너만 나오면 항상 의문점이 돼.”
“그래? 신기하네. …알고 있지? 그럼, 다음에 또 보자. 히로카.”
“진짜 뜬금없게, 영혼 없는 말이나 뱉고 말이야…….”
정말 중학생이냐고. 질책을 담고 짤막이 웃는다.
그리고 암전이었다.
“……아.”
꿈이 깨지며 현실이 불쑥 덮쳤다. 늦잠이었다. 제 쓸모를 다 못하고 허리춤에 걸쳐져 있는 이불을 잡아당겨 머리끝까지 덮었다. 입술이 바짝 말랐다. 마른 숨을 몇 번인가 내쉬고, 아직 선명한 장소를 몇 번이고 되돌린다.
그리면 그릴수록 조금씩, 착실하게 창가와 바닥이 무너져내리고 형체를 유지하는 건 우에다 유이토와 마토 히로카 둘이다.
아니, ……마토 히로카 뿐이었다.
창가로 들이치는 햇살이 원망스럽다. 부스스 떠지는 눈을 몇 번이고 다시 닫았다.
네가 나오는 꿈을 꾸고 난 다음 날이면 아무렇지 않던 한마디도 깊숙이 상처를 남긴다.
너와 함께인 모습을 언제나 상상해왔는데, 결국 넌 잡을 수 없는 곳에서만 존재하니까. 꿈속의 네가 남긴 웃음이 흐릿한 잔상을 남긴다. 겨우 한날의 꿈. 그 허망한 것에 이리저리 흔들린다.
억눌린 것이 무너지며 마음을 범람했다. 타는 갈증은 일상이 되어 속에 머물렀다. 그렇게 호흡기에 염증이라도 생긴 마냥 숨마저 벅차다가도 정작 네 미소를 보니 또 웃음이 나오는 게, 아무래도 네 앞에선 본인마저도 아무것도 아닌가 보지. 그러니 아픔을 망각하고 웃는 것이 틀림없다. 스스로 정의하길 쾌락 주의자인 내가 겨우 한 사람에 의해 숨겨둔 그늘이 수면 위로 떠 오르는 게 두렵다. 그만큼 네가 내 안에서 크다는 의미니까. 그런 네게 밀쳐졌다는 생각이 들거나 친구라는 울타리 안에서 그 이상으로 다가갈 수 없는 것을 깨달을 때면 어찌나 억울한지. 허름하고 낡은 울타리를 뛰어넘거나 무너트릴 생각도 못 하고 손만 올려 겨우 몸만 지탱했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너를 바라본다. 거친 표면에 쓸려 발갛게 달아올랐다.
상냥함이 잔인할 수 있다는 것도 네가 알려줬다. 너의 한 마디는 비수가 되고, 무참히 꿰뚫고 지나친다. 더욱 웃는다. 사실 너도 알고 있잖아. 말해 줘, 유이토. 꼭꼭 감춰둔 속내가 입술 사이로 튀어나올까 두렵다. 한 번 입 밖에 내버리면 바닥끝까지 드러낼 게 분명한 마음 위에 가림막을 씌웠다.
저린 속을 삼키고. 이러면, 너 역시도.
“유이토.” 다정한 말을 뱉는다.
우리는 서로에게 잔인하다. 전하지 못한 마음이 고여 악취가 났다. 아직은 너를 배려할 정신이 남아있었다. 곯아가는 것을 끌어안는다. 이미 익숙하지만 때때로 견딜 수 없이 지칠 때가 있어서 가끔 너를 원망하기도 했다. 달콤한 회피였다. '사랑은 언젠가 식는다.'라고, 3년이란 기간이 최대라고 한다. 이미 2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렇다면 세상이 한 번만 더 분홍빛으로 물들고 시든다면 널 떠날 수 있을까. 이 아픔도 더 안 느껴질까. 지금까지 사랑한 시간이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는 가정은 순간은 편안할지라도, 조금이라도 정신을 차린 뒤부턴 감당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회피는 짧았다. 옅은 만족감은 빠져나가고 진득한 자괴감이 빈자리를 채웠다.
욱씬, 골이 울린다. 입술을 잘근 깨문다. 느린 숨을 내쉬었다. 눈을 감는다. 생각을 비워낼수록 차오른다. 네가, 네가 보고 싶었다.
어떤 의미인지 알려줄 수 있어?
별 것 없었다. 여느 때처럼 툭 던지던 은근한 질문이었다. 너의 예외라 말한 내가 어떤 의미의 존재인지, 이번엔 네가 먼저 솔직히 말해주길 바라는 말이다. 아마 넌 여느 때와 똑같겠지만. 알고 있었다. 이미 몇 번이고 겪어본 일이었으니 내가 원하는 대답은 나오지 않을 것이란 것도 잘 알고 기대해서도 안 되지만, 어디 그게 마음대로 됐던 적이 있던가. 원치 않는 희망 고문이다. 예외라는 말이 네 입에서 나온 뒤부터 자꾸만 해선 안 될 기대를 품게 된다. 또다시 흐지부지 끝나면 홀로 상처 입을 게 뻔한데. 만일 대답이 돌아온다 해도 거부당하면 그때엔 정말 어쩌려고? 정말 기대란 게 나를 따라주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네가 내밀어 온 답에 나는…….
“어떤 의미의 예외일 것 같아? 질문에 질문으로 답할게. 그래도 괜찮지, 관대한 마토?”
분명히, 기대란 건 제멋대로지만 제대로 된 대답 한 번 해주지 않는 네게서 과거 애정에서 비롯한 호칭을 듣자 머리가 핑 돌았다. 단번에 확 치솟으려던 것은 차게 가라앉는다. 벌써 수십 번도 겪은 일이다. 강제로 화를 억눌러 이성을 유지하려는, 이제는 익숙한 과정이었다.
머리가 차게 식자 가장 깊숙한 곳에 머물던 것이 스멀스멀 벽을 타고 올라온다. 서서히 뒤덮여갔다. 여기서 그 이름을 부르는 이유가 뭐야. 예전부터 이어져 온 말도 안 되는 호칭을 지금 이 순간, 서로를 정의 내릴 때 꺼내들 건 뭐야. 속이 울렁거렸다. 어째서, 유이토. 열기가 침체한다. 서서히 가라앉는다. 그러나 날카로운 잔재들이 여전히 속에 부유했다. 공존할 수 없는 모순적인 감정은 때때로 밑바닥에서부터 기어 올라와 번갈아 뒤흔들곤 했다. 아주 얌전하다가도 눈치 못 채는 사이 순식간에. 마토 히로카를 한껏 비틀며.
코앞까지 들이닥친 감정은 차마 비껴갈 새도 없이 덮쳐온다. 그때부터 조금씩, 조금씩 균열이 일었다.
“이크, 그렇담 어쩔 수 없죠. 난 관대한 마토니까 말이지.”
비뚜름한 미소. 고의가 다분한 말. 말하는 도중 무의식처럼 억눌러 노골적이지 않은 비꼼이었다. 그래도 네게는 절대 하지 않으리라 생각한 것을 무심코 내뱉어버렸다는 사실만으로 버거웠다. ……전보다 참기가 더 힘든 것 같아. 짧게 돌이켜 보니 정말로 그랬다. 어쩌면 내가 한계에 몰려있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그런 생각이 스쳤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다가 잠잠해지면 다행이었지만, 그 이후로 예측할 수 없는 순간에 닥쳐올 상황이 눈에 훤하니까. 두려움, 혹은 걱정이었다.
말을 골라 차분히 늘어놓는다. 절친한 친구. 친애하는 사람. 갑작스러워도 짜증 나지 않는 존재.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사람’ 같은 건 스스로가 먼저 부정했다. 대답을 모르니까. 거부당할까 봐. 전부 네가 내어준 것이고 서로가 그어놓은 한계인 것만 나열했다. 어린아이 같은 투정이다. 상처 입고 잔뜩 가시를 세운 채 몸을 웅크린다. 자기방어적인 심리였다.
하아. 옅은 한숨으로 말이 끊어진다. 얼마 안 있어 네가 입을 열었다.
“…응, 너무 충분해서, 어, 진심으로.”
잔잔한 미소. 목소리. 덧붙여서.
“진짜 기뻐. 절친한 친구라, 감동적인 수준인걸. 또… 네게 그런 말 들을 정도로 잘난 사람이 아닌데, 그… 음. 다섯 손가락은 역시 무리였나 봐. 어쨌든, 영광일 따름이야. 역시 내게 너무… 과분한 것 투성이네.”
애써 미소를 그려내서 네게 시선을 뒀다. 유이토의 말을 곧이 고대로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그래? 좋아해 주는 것 같아 다행이네. 과분까지는 모르겠어. 난 진실하거든. 하지만 방금 내가 한 말이 정말 바라던 대답이었던지, 진심인 건지 사실 조금은 의심스럽네. 지금 같은 모습은 내가 줄곧 보아왔던 거잖아. 안 그래? 유이토.
무엇이 속마음이고 네게 전했던 말인지 상념에 잔뜩 얽혀들어 구분해내기조차 어렵다. 헷갈렸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머릿속으로는 이미 수십 번이고 수천 번이고, 혹은 그 이상으로 네게 사랑을 고백했다. 태연한 얼굴로 웃고 속으론 연신 네 이름을 부르고 눈앞에 널 보며 그리워했다. 안고 가야 할 것과 네게 전할 말을 구별하지 못하고 한꺼번에 쏟아냈다면 진즉에 거부당하고 끝났을 거다. 조금만 들춰내도 바로 알아차렸을 감정이었다. 그래서 네 앞에선 늘 차분해야 했다. 가능한 이성을 붙잡고 늘 여유롭게. 그게 안 되면 네 차분함을 흉내 내어 자신을 억눌렀다.
일말의 희망을 품었다. 나와 똑같진 않아도 어쩌면 조금은, 그 일부쯤은 비슷할 거라고. 목소리, 시선, 눈의 깜빡임, 미소 짓고 시선이 얽혔던 횟수.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으나 전해지는, 그런 것. 닿을 것 같으면 조금 일렁이다 서서히 희미해지고, 떨어지는 순간 곧 담담하게 전해오는 음성. 그리고 완전히 사라진다.
진심을 엿보아도 얘기할 수 없었다. 넌 마치 이 거리를 유지하고 싶어 하는 사람 같았다. 발견하는 순간마다 마토 히로카는 무너졌다. 침묵에 잠겨 절망했다. 네게 왜 그러냐며 소리칠 수도 없는 처지다. 불안하고, 조바심이 들고, 아무리 원망스러워도. 거기까지가 내 위치의 한계 같았다. 확인하려 들지 않았다.
도대체 왜? 너도 날 좋아하잖아. 그래서 네가 먼저 말해주길 바랐다. 조심스럽고 아주 천천히 다가가 겨우 가까워졌는데 단박에 타인으로 밀려나고, 절망하고 미워하다 결국 그 모든 걸 사랑에 들이고 다시 발을 뗀다. 수천 번의 물음을 밀어 넣고 지워내기를 반복하다 겨우 하나를 골라 입 밖으로 낸 질문엔 대답이 없었다. 흐지부지 넘어갈 때 내 심정이 어땠는지.
“티가 났나 보네. 진짜 과분해. 진심이고.”
“어. 그러게, 티가 났나 봐.”
미소를 띠고 담백하게 말했다.
“티가 나면 안 될 텐데. 좀 더 노력해야지. 그래서 전혀 모르도록 해야 할 텐데. 맞지?”
겉과 속의 간극이 극에 다다른다. 거듭되는 것이 힘들다. 일상이다. 네 생각에 머리가 욱신거릴 정도다. 입술을 깨물었다. 널 바라보기 힘들어 고개를 돌렸지만, 머릿속에선 선명히 그려졌다. 무의미했다. 갑갑함에 머릴 쓸어 넘긴다. 어느새 멈추다시피 했던 호흡을 깨트렸다. 한숨이 나왔다.
“…아니. 유이토는 지금도 잘 모르겠는 걸. 확신이 안서거든. 그래서 너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은데 넌.”
평소보다 말이 빨랐다. 아랫입술이 아프다. 억지로 참고 끌고 온 것의 일각이 드러났다.
넌 늘 내치는 것이 아니라 한 편을 내어줘서 그에 안도할 때면, 네게는 항상 내가 모르는 다른 부분이 숨어있었다. 다 내어주길 바란 건 아냐. 다만 유이토……, 널 완전히 알아내길 바랐던 건 내 지나친 욕심이었을까. 그것이 네 상냥함이었을지는 몰라도 때론 배려에 숨이 막혔다. 이기적인 사람이라 조금만 아파도 네 속을 가늠할 수 없던 탓에 더욱더 심했다. 드러낼 수 없는 연정에 통증을 느꼈다.
흐리게 웃는다. 눅눅한 감정에 녹아들고. "유이토는 가끔, 내게 너무하니까." 주절거림.
오롯이 드러낸 파란 눈동자를 좋아한다. 따뜻하고 때론 더위를 식혀주던 손의 온기도, 잠시나마 닿았던 얼굴마저도. 막연히 네게 가까워지고 싶단 욕망은 널 사랑한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전부 해소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자꾸만 욕심이 난다.
손을 뻗는다. 볼이 닿았다. 손끝에 귀가 스치고, 천천히 들여다보던 시선을 멈췄다. 지금까지 숨겨왔던 모든 것이 범람한다. 지금의 나는 어쩐지 충동적이었다. 앞으로 내 입에서 나올 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겨우 세 음절의 한 마디. 우리 사이를 변화시키기 충분하지만, 이 말을 뱉는다고 해서 지난날의 세월이 전해지기엔 충분하지 않을 터였다. 모든 것을 담고 울릴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리고, 경이롭던 것. 그 감정들. 어떻게 오롯이 전해질 수 있을까.
저린 마음을 토해냈다.
"…유이토. 좋아해.”
어쩌면 그 말은, 내게 있어 사형선고와 동일한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무슨 뜻이야?”
여태까지의 잘못이 이런 식으로 돌아올 줄은 정말, 정말 상상도 못 했기에 내뱉으면 끝일 줄 알았던 내 어리석음을 탓해야만 했다.
“어떤 의미인 거야, 히로카.”
아, 탄식을 삼킨다. 심연으로 끌어내려 진다. 나름의 각오 끝에 내뱉은 말에 되돌아온 질문은 조금 전과 겹쳐지며 숨이 턱 막혀온다. 눈앞이 뿌예지는 기분이었다.
유이토. 넌 왜……. 네 잘못이 아닌 걸 아는데도 괴로웠다. 독하다. 어긋났다는 이 상황이. 네게 향하려던 원망의 화살이 돌연 뚝 끊어졌다. 네 앞에만 서면 어떤 상황에서도 차분하려 했던 게 버릇이 된 덕이었을까. 거꾸로 된 살을 쏜다. 좋아한다고 말했는데, 이제야 겨우 드러낸 감정이 빗겨나간 걸 네 탓으로 돌려도 되는 걸까.
속이 따끔거렸다.
…내가 널 이렇게 만들었어? 우리가 서로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난 정말, 그동안. 혼자 고생했다고 생각한 것이 무색하도록 같은 통증을 겪었던 걸까. 지독하게 파고드는 통증을 피하고 싶어 의심을 먼저 내세우게 됐던 것도, 너 역시 겪고 있던 거였을까.
홀로 궁지에 몰려있다고 생각했다. 양방향이라는 가정을 믿더라도 실질적인 외사랑이라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버틸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만약에, 정말로 내게도 조금의 가능성이 있다면…….
네 갑작스러움은 싫지 않아. 언젠가 들었던 네 말이 떠오른다. 마지막이 되더라도 받아들이자는 결심은 네 앞에서 무용지물이 됐다. 네 앞에서 그렇게 차분하려고 애를 써도 언제 한번 안 흔들린 적이 있던가. 말 한마디에 수없이 천국과 지옥의 경계를 흐려놓았는데, 이제 와 겁난다 해서 어쩔 도리가 있을까……. 결국 웃는다.
도망가지 마. 물러서지 마. 거부하지 말아줘. 무의식이 반영된 움직임으로 유이토의 뒷목을 받치듯 감싸 쥐었다. 엄지로 입술을 뭉근히 누르고, 당장에라도 입 맞출 것을 초인적으로 참아가며 거리를 좁혔다. 찬찬히 들여다봤다. 콧대를 따라 내려가고, 볼을 쓸고, 귀에 스치고. 시선과 손으로 함께 쓸어내린다. 처음이 아님이 감사하고 그 사실이 어쩐지 기뻤다. 강압적이지 않기 위해 힘을 풀어버리니 속이 배로 떨려왔다.
“유이토, 희망은 나를 죽여.”
이러면, 너는 도망칠까. 줄곧 거리를 유지하던 너이니 이번 역시 밀어낼지도 모른다. 내가 멋대로 가까이 다가갔으니, 그것도 호흡이 겹쳐지고 온기가 느껴지는 코앞까지 좁혀버렸으니 아예 거부해버릴 수도 있었다. 그럼 우리는 영영 끝일 것이다. 우리 관계에서 선택권은 유이토의 것이었다. 적어도 내겐 그랬어. 네가 내어주는 칼을 기꺼이 목에 댈 것이다. 더는 친구라는 허울 좋은 사이로도 남을 수 없을 거였다. 어차피 유리 발판 위의 위태로움, 체념으로 끝난다 해도 상관없지 않을까.
…아니, 아니.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명백한 우문이다. 그 기억들에 이름을 붙인다면 행복이어야만 했다. 애정으로 가득 찬다. 네 이름 세 음절이 찬란하고 아득하고 그립다. 종이 위에 써지는 이름마저도 닳을까 봐 애가 탔다. 유이토. 입 밖에 내지 못하는 부름만 몇 번이었는지. 모든 걸 채우진 못했지만, 속에서 찰랑이는 감정은 그 순간의 나를 미소 짓게 했다. 심장의 울림도, 분위기도, 네 전부는 몇 번이고 사랑에 빠지게 했다. 다만 나는 이 웃기지도 않는 가면도 지쳐서, 더는 견디기를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유이토. 어쩌면 좋지. 나는 길을 잃어버렸어. 네가 손을 잡아주지 않는다면 서서히 죽어가겠지. 곯아 터진 마음으로 태연함을 가장하고 사랑하는 이를 마주하고 웃을 텐데. 서로 다른 진심으로 미소 짓는다는 가정은 통증만 남겼다. 짐작이 사실로 다가올 때면 또 한 번의 단편적인 죽음을 맞이할 터다. 이상하게 그걸 인지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조금이나마 차분해질 수 있었다. 그를 마음에 들였던 탓인지 특유의 차분함마저 전염성 짙게 옮아왔다. 내게 치는 파도조차 사랑했지만, 차라리 완전히 감정에 적셔져 모든 걸 고백하고 싶은 적이 한둘이 아니었다. 거센 물살에 몸을 맡기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질 못했다.
네가 내린 침묵에 잠긴다. 그 아래서 네 이름을 되새겼다. 입에 익은 소리는 몇 번을 불러도 아쉬움이 남아서. 유이토. 이름 한 번에 기억 하나. 꽉 채워서 내게 온다. 눈이 시리다. 목이 멨다. 마지막이라는 가정은 끝내 네 이름을 부르게 만든다. 그때였다.
네가 내게로 손을 뻗는다.
유이, 토…….
부름이 끊긴다. 말이 부서진다. 거리가 좁혀지고. 어느 때보다 가깝다. 닿은 곳부터 조금씩, 온기가 번진다. 낮은 음성이 귀를 간지럽혔다.
“그건 내가 늘 하고픈 말이었는데.”
숨을 멈췄다. 온기. 감촉. 목소리. 평정을 연기할 수조차 없이 바라던 것은 비현실적이다. 바라던 것이 이뤄지던 꿈이 연상됐다. 네가 다가왔던. 모든 게 이뤄지는 장소. 이 순간도 꼭 꿈같았다. 지독하게 현실적이고, 그리하여 비현실적이다. 혹시 정말 꿈이 아닐까. 허망하게 사라져버릴 붙잡을 수 없고 닿을 수 없는 것.
“히로카.”
…아. 절대 그럴 순 없었다. 부유하는 감각을 떨쳐내고자 네게 손을 뻗는다. 허리에 팔을 둘러 껴안았다. 소중하고 또 소중해서 부드럽게 감싸듯이.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사이로 스친다. 얽히도록 끌어안았다. 견고한 네가 나약한 나를 지탱해준다. 고개를 떨궈 네게 기대고, 간절히 잡았다. 몽롱한 열기가 전신을 사로잡는다. 벅찬 한숨. 엷은 떨림. 나직하게 전하는 속삭임. 또 한 번의 진심.
“좋아해….”
환희. 절망. 애달픔. 충족감. 간절함. 원망. 그립고. 아득하고. 경이롭고. 깊이 새겨진 감정들. 그리고 우에다 유이토. 이 모든 감정의 근원지이자 내가 사랑할 수밖에 없던 사람.
“네가 나랑 같다면 말야… 어. 나도 좋아해, 히로카.”
정말로, 영원 같은 찰나다.
나의 체온은 곧 네 입술의 온도가 되고,
불현듯 네게 입을 맞추고 싶어진 것은 비밀로 하자
/ 태풍의 눈, 서덕준